N5BRA
A SPACE ODYSSEY
Solo Show, Gallery Stan
June 9 - July 2, 2023

글.박제언

작가 노브라의 작품을 이야기 하는데 있어 신체는 빠질 수 없는 논제이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작품 속 여성의 누드는 노브라가 천착해온 소재 중 하나이자 작품을 통괄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를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 하고 타자화 시키는 과정으로 보기도 하고 또 혹자는 그의 작가명 ‘노브라’와 연관지어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는 도구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실, 노브라가 수십여점에 걸쳐 그려온 누드화는 일종의 자화상에 가깝다.

2017년 작 <I was not your rose, i am not your rose, i’ll not be your rose>(2017)는 작가가 20세 무렵 미아리 사창가를 지나면서 한 경험을 토대로 그려낸 작품이다.

“빨간색 글씨의 ‘청소년 출입금지구역’ 그리고 정말 손두뼘 만한 창문이 달린 다 무너질 것 같았던 이삼층 높이의 상가 건물...정말 이런곳에서 매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중략)...할머니 분들이 옷소매를 잡아끌며 아가씨를 보고 가라고 잡는다. 순간 그냥 도망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 무너져 가는 건물 사이로 작가가 목격한 ‘아가씨’들과 옷을 잡아채는 포주에게서 도망치면서 느낀 두려움과 당혹감, 그리고 일종의 혐오에 가까운 공포를 작가는 노트에 위와같이 기록하고 있다. 작품 속 무너져가는 건물의 문을 열고 밖을 힘없이 응시하는 벌거벗은 여성-창녀-는 가까스로 문간에 기대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여성의 벗은 어께 너머로 보이는 문패에서 ‘378’ 이라는 번지수를 발견할 수 있는데, ‘378’은 당시 작가가 살고있던 집의 주소와 같다. 전업작가를 꿈꾸던 노브라가 세상에 나와 처음 맞이한 미술계는 차가웠을 것이다. 그림은 숫자로 가치매겨졌고, 작가는 스스로가 마치 매춘부처럼 불리는 금액에 맞춰 무언가를 내놓는 존재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노브라는 이 작품에서 자본주의 시장에서 예술의 위치와 작가로서의 자기존재를 매춘하는 여성에 비유하며 그 연약한 실존에 대해 은유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물 옆의 텍스트를 통해 “나는 너의 장미였던 적 없고, 지금도 니 장미가 아니고, 앞으로도 될 생각없어.”라고 말하며 세상이 만든 방정식에 팔려나가는 물건(장미)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지는 강력하고 역동적인 소위 ‘남성적’ 선언이라기 보다는 스러질듯한 불씨를 가까스로 지키는 ‘여성적’ 버팀에 가깝다. 소멸하기 직전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노브라가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자기반영의 주요한 주제이다.
노브라의 작품에 등장하는 에로티시즘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재와 그에서 오는 불안에서 비롯한다. 2021년부터 제작한 ‘피투’된 인간 시리즈는 이러한 작가의 인식을 드러낸다. 작가의 세번째 개인전 제목인 <sand castle>에서도 볼 수 있는 인간-특히 작가 자신-의 불안정성에 대한 인식은 그 후에 제작된 작품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뒤틀린 포즈로 서 있는 나체의 여성 위에 정액과도 같이 뿌려진 물감-페인트-는 대상화된 신체에 폭력적인 방식으로 얹어지지만, 그럼에도 인물들에게 섞이지 못하고 화면 밖에 머무르며 평면과 바깥세계의 경계를 인지시킨다. 섞일 수 없는 내부와 외부가 두꺼운 물감의 마띠에르에 의해 구별되며 회화 속 인물은 일종의 보호받을 수 있는 세계로 도망치게 되지만, 그로인해 회화안에 고립되며 소통역시 단절된다. 반복해서 그려지는 누드화의 흐름에서 신체는 계속적으로 무너지며 일부는 뒤틀려 있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당시 정신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은 작가의 내면과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무너진 신체에 대한 인식은 작가로 하여금 또다른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한다.

2023년 노브라의 작품에서 가장 큰 변화는 유화의 등장이다. 그래피티 아티스트라는 배경에서도 드러나듯 그는 첫번째 개인전을 선보였던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잉크와 아크릴 스프레이, 마스킹 테이프와 아크릴 마카를 사용하여 낙서화와 유사한 방식으로

캔버스에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2023년, 특히 이번 개인전 <스페이스오디세이 : 불안과 감상>에서 선보이는 신작들은 모두 유화로 제작이 되었으며 이전작의 균일한 표면과 달리

물감의 마띠에르를 살린 터치를 강조한 붓질로 다소 거칠게 마감되었다.
유화로의 전이는 작가 스스로 인식한 신체의 무너짐에서 비롯된다. 작품 안에서 무너진

여체는 작가 자신을 의미했고, 캔버스-세계-안에서 불안정한 인물은 존재가 흔들리고 있음을 나타냈다. 화면 안에서 작가는 무너진 원근법과 신체구조를 보며 불안정한 작가 스스로의 상태에 대한 거울로 삼았다. 인물을 공간 안에 바로세우는 것이 존재의 증명이리라 느낀 작가는 가장 솔직한 재료라고 생각한 유화물감을 사용하면서 고전에서 비롯한 원근법을 이용하여 인물을 화면안에서 바로세운다.

인본주의 시대에 고안된 원근법은 평면 안의 세상을 지키는 규율과도 같았으며 일종의 로고스로서 기능한다. 작가는 자신의 불안을 오래된 전통적 재료인 유화와 전통화법인 원근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인물을 관통하는 구조물들은 일종의 보조선 또는 지평선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구조화 시켜 만든 결과이다. 몸을 뚫고 지나가는 창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얼핏 인물을 해치고 있는 무기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들을 화면안에 온전히 존재하도록 붙잡고 있는 생명선에 가깝다.

이번 신작에서 보이는 인물화에서 나타나는 중첩된 인물의 눈은, 여러개의 눈을 가졌다는 그리스 신화의 괴물 아르고스를 떠올리게 한다. 지평선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한쌍의 눈은 바른 위치를 가지고 있지만 나머지 눈은 잘못된 투시로 생기는 오류를 그대로 남겨놓은 것인데, 이는 작가가 설정한 시점 이외의 상태를 중첩하여 표현함으로써 다른 시점에서 존재하는 눈을 그려놓은 것이다. 기준선에 맞게 존재하는 눈이 작가에게 있어 안정과 평안을 상징한다고 가정했을때, 원근에서 벗어나서 존재하는 나머지 눈은 일종의 분열된 자아이자 불안의 상징으로 여겨질 수 있다. 결국 작가 노브라에게 있어 그린다는 행위는 불안과 안정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실존하는 자신의 존재증명을 찾아가는 영원한 과정인 것이다.

“내 인생은 그저 똑바로 서 있기 위한 투쟁이었다...(중략)..삶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다. 내 예술은 개인적인 고백이었다...(중략)...하지만 나는 이 불안이 내게 필요한 것이라고 느끼며, 삶에 대한 두려움과 병이 없었다면 나는 키를 잃은 배와도 같았을 것이다.”

19세기 말 유럽의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인간의 세기말적 불안을 그려낸 에드바르트 뭉크가 남긴 말이다. 작가 노브라 역시 21세기 이후 급격하게 변화하는 신자유주의 안에서 불안한 청년의 자화상을 개인의 실존에 은유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뭉크의 말과 같이, 불안이 그의 회화에 있어서 일종의 원동력이라면 불안이 해소되었을 때 그의 작품은 어디로 가게 될 까? 이에대한 노브라의 답은 그가 스스로 인용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실존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피투된-세상에 던져진-존재이기에 영원히 불안하고 외로울 것이나 끊임없이 다시 존재를 증명하고, 찾고, 부여잡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작가의 의지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느껴왔을 외로움에 작은 위로를 던지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로 하여금 노브라의 작품에 감동하고 시선을 머무르게 하는 요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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