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5BRA
Not Sorry, and N5BRA
JUL 13 - AUG 11, 2019

글.심우인

잉크 작업을 마친 화면 위에 아크릴 스프레이를 분사한다. 스프레이가 마르면 마스킹을 제거한 뒤 아크릴 마카를 사용하여 인물의 세부 묘사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한다. 이는 고교 시절부터 다년간 낙서가(graffiti writer)로 활동을 해 온 작가 노브라(N5BRA)의 작업 방식이다. 인체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인식과 사회문제로 주제의 외연을 넓혀 온 노브라. 선전물과 같이 역동적인 구도로 구성된 화면 속 인물들이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캔버스 전면에 가득 채워진 인물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관객을 응시하거나, 프레임 속의 서사에 집중하고 있다. 대형 벽화 작업을 비롯하여 신화, 종교, 명화 등 고전 모티프의 차용과 위트 있는 연출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 세계는 동시대 예술의 다양한 변주 속에 작가로서의 향후 행보를 기대하게 한다.

‘노브라’라는 이름은 그를 설명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요소이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동시에 우리의 삶의 조건을 모색하게 한 발단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그가 낙서화 작업 초창기 시절에 사용하던 태그네임 ‘RR(Double R)’에서 기인하는데, ‘Double R’을 쉽게 발음하기 위해 'The BULR’로 바뀌었다가 어느 누군가가 ‘노브라’라고 장난스럽게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의 ‘노브라’로 굳어졌다. 이미지의 완벽한 재현보다도 무의식적인 행위에 집중하는 낙서화가들의 자율적 경향과 맞닿는 지점이다. 작가는 남사스럽게 들릴 수도 있는 자신의 이름이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누드’라는 시각적 요소와 맞물려 편견 어린 시선으로 비추어지기도 하였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도의적인 책임이 따를지언정 모든 개인은 칭찬이든 비난이든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태생적으로 불법일 수밖에 없는 낙서미술에 몸담고 있는 노브라에게 자유에 대한 직관적 통찰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노브라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문제의 본질을 기민하게 포착한다. 이름에 얽힌 일련의 상황과 더불어 요즘 주요 이슈인 성차 간의 갈등이 그로 하여금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에 주목하게 하였다. 서로 간에 충족되지 않는 인식의 결핍을 환기시키고자 한 작품 <GIRLS CAN DO ANYTHING>(2018)은 여성 작가 젠틸레스키와 남성 작가 카라바조가 유디트를 다룬 두 작품을 한 화면에 끌어들임으로써, 동일한 사건이 작가의 관점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말풍선의 텍스트 ‘Girls can do anything(소녀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국내 페미니즘의 시류 속에서 등장한 표어로서 본래 의미하는 바는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믿는 것이 정말 자신의 자유이었는가를 돌이켜 보자는 자성적인 외침이다. 하지만 오해의 반복을 거쳐 남녀 서로가 대척점에 놓여 있다고 믿게 하는 의미로 곡해되기도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1950)이 시사하듯이 엇갈린 입장의 간극은 본질마저 훼손시키게 되기 마련이다. 인식의 문제로 가지를 뻗쳐 나간 작가는 10미터에 달하는 대형 벽화 작업 <FORGIVE US>(2018)를 통해 사회적 갈등의 해소를 제시한다. 이 작품은 윌리엄 부게로의 회화 <피에타>(1876)를 오마주한 것으로, 예수가 걸었던 용서의 길과 성모의 인간적인 비통을 오늘날의 현실에 위치시켜 재해석하였다.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진행된 그의 제작 과정은 공공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낙서화의 명맥을 이어나가는 행위로서 그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이행하는 수단인 셈이다.

<LEMMA 1>(2019)은 벤베누토 첼리니의 청동상 <메두사의 잘린 머리와 페르세우스>(1554)를 본 작가가 메두사의 처참한 풍경이 한 영웅의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탈바꿈한 모습에 의문을 품고 제작한 것이다. 메두사는 아무런 잘못 없이 저주받아 괴물이 되어버린 것도 억울한데 신들의 농간으로 참수까지 당한 터. 작가는 이러한 왜곡된 관념이 오래도록 당연시되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페르세우스를 주축으로 리듬감을 형성하며 내려오는 메두사의 머리들은 관습적 반복을 거쳐 우리의 인식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시각화한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이들은 페르세우스의 날카로운 광배와 맞물려 바기나 덴타타(Vagina Dentata)로서의 저항을 침묵으로써 역설하는 듯하다.

노브라는 2019년 LKIF 갤러리에서 개최되는 첫 개인전 《Not Sorry, and N5BRA》을 통해 인식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의 결과물을 선보인다. 소외된 대상, 즉 우리 인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의 재해석이 작가의 전반적인 작업을 관통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하여 도입한 차용과 오마주 등의 장치는 작가의 자의적 상징성이 부여됨으로써 독특한 조형 어휘를 새롭게 생산해내는 효과를 낳았다. 그로 인하여 작품은 현대 사회문제를 공유하는 관객과의 소통을 통하여 미학적 공감뿐 아니라 동시대적 서사로 해석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노브라는 낙서를 사회적 소통의 기호로서 견지하며 ‘Not sorry’라는 대목에서 엿보이는 것과 같이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길을 걷겠다는 낙서가로서의 태도를 유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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